[김영조의 우리문화편지]
조심스럽게 다루던 조선의 소나무
그윽한 회포가 정히 근심스러워 幽懷政悄悄
그대로 얽매어 둘 수 없는지라 不可以拘囚
파리하게 병든 몸 애써 부축하여 强扶淸瘦疾
갑자기 높은 언덕을 올라가서 忽爾登高丘
손으로는 등나무 지팡이를 끌고 手携藤竹杖
앉아서는 소나무 안석에 기대니 坐倚松木几
시골 정취 어이 그리 뜻에 맞는고 野情一何愜
-《사가집(四佳集)》 제3권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25세에 관직에 오른 이후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문장가로서 대문호(大文豪)소리를 듣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시에 등장하는 소나무는 의자가 되어 등을 기댈 수 있는 반려자로 나옵니다.
소나무는 푸르르고 올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알려져 예부터 우리 겨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러한 소나무는 목재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관리 감독 또한 철저했지요.
《선조실록》 17권 16년(1583) 기록을 보면 소나무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 하여 함부로 벨 수 없었는데, “소나무 벤 자를 적발하여 함경북도 북단 경원으로 들여보낸다는 헛소문에 경기도 안의 백성이 선동되어 소나무로 울타리를 한 자, 혹은 집을 지은 지 얼마 안 된 자들이 너도나도 헐거나 불태우고 땅에다 묻기도 했는데, 며칠 내로 그 소문은 호남과 영남까지 번져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였지요.
그런가 하면 영조 12년 종묘 영녕전 담장 밖의 큰 소나무가 비바람에 넘어졌는데, 그 소리가 궁궐 안에까지 들렸으므로, 위안제(慰安祭)라는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또 정조 16년에는 바람에 쓰러진 안면도의 소나무를 소금 굽는 일에 쓰도록 허락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소나무와 얽힌 일들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