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대학에 처음 입학한 이진규(30·수원 권선) 씨. 당시 충청도에서 서울로 유학생활을 해야 했던 이씨에게 시골의 부모님이 고가의 '삐삐(호출기)'와 '시티폰'을 선물해 주셨다. 삐삐는 아직도 의사나 일부 단체서 사용하고 있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공중전화가 설치된 주변 반경 200m 이내에서만 휴대전화처럼 통화가 가능(발신 기능만 됨)했던 '시티폰'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씨는 "1백만원을 호가하던 무전기만 한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던 시절, 시티폰을 가진 것만으로도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1여년 만에 공짜나 다름없는 저렴한 PCS폰이 등장하면서 시티폰을 사용하던 이씨는 '조롱거리'가 됐다.
하지만, 이 둘의 조합에 매료된 이씨는 아랑곳없이 1999년까지 사용해 오다 정부가 돌연 시티폰 통신을 모두 중단하면서 어쩔 수 없이 PCS폰으로 바꿔야 했다. 당시 한국통신에서 PCS 단말기를 공짜로 줬고, 사용료를 3만원 정도를 면제해 준다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올해 8월. 이씨는 휴대전화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기에 낡은 휴대전화를 바꾸려고 휴대전화 대리점을 찾았다가 또 한 번의 불가항력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현재 사용하는 016에서 010으로 변경하거나, 통신사를 옮기면 휴대전화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리점 직원이 현재 2세대(G) 폰은 정부의 010 번호통합정책에 따라 내년쯤이면 모두 사라져 차라리 지금 3세대(G) 폰을 바꾸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이 씨는 "016을 평생번호로 여기고 써온 만큼 번호를 변경하고 싶지도 않고, 반강제적으로 통합하는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며 결국 낡은 휴대전화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진열된 2G폰 단말기도 몇 종되지 않았지만, 혜택적용이 되지 않아 3G폰보다 비싼 것도 구매의사를 포기하게 된 이유다.
방송통신위원회와 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식별번호 010 사용자는 전체 이동통신 가입자 4천498만명 가운데 63.2%(2천829만명)을 차지했다. 지난 2007년 6월 49%(2천76만명)에서 불과 1년 만에 700여만명이 늘었다. 정부가 지난 2004년 특정 통신사의 독과점을 막겠다며 010 번호통합 정책을 펴면서 010 가입자의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방송통신위는 현 추세로 가면 내년 상반기쯤 010 가입자가 80%에 육박, 전체 이동전화 가입자를 대상을 010으로 강제 통합할지를 검토한다는 견해다.
업계도 이 추세에 발맞춰 국내 휴대전화 시장을 3G폰으로 재편하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기존 2G폰 생산을 줄이거나, 아예 개발을 중단하기도 했다. 지난 상반기 이동통신 3사가 내놓은 제품 총 45중 중 13종(약 20%)만이 2G폰일 정도다. 실제 팔달구 모 대리점 관계자는 "시중에서 개인의 취향에 맞는 2G폰을 찾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면서 "2G폰을 찾는 고객이 있어도 화상통화나 DMB가 가능한 제품을 권해 드린다"고 했다.
반면 이 씨처럼 010 번호통합을 곱지 않게 보거나 번호를 바꿔야 할지 고심하는 가입자도 크게 늘고 있다. 이들은 정부와 통신사들이 3G 시장 공략에 몰두하면서 기존 번호를 사용하던 가입자의 선택권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특히 최근 팔달구 한 지점에서 신규 가입한 강모(34)씨는 "개인적으로 011 브랜드를 선호하는데, 신규가입은 010만 가입된다"면서 "식별번호도 소비자의 취향인데 편의상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업상, 업무상, 개인의 취향상 기존 번호를 고집하는 가입자들은 소비자 주권의 시대, 여전히 01X의 식별번호를 사용하는 가입자도 전체의 36.8%(1천646만명)에 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방송통신위는 010 번호통합 정책을 변경하면 기존 가입자와 형평성에도 어긋나고, 통합정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며 난색을 보였다.